Introduction|같은 복음을 들었는데 왜 반응은 다를까?
같은 복음이 선포되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도 별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같은 복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나아옵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요? 설교자의 능력, 듣는 사람의 지성이나 성품, 혹은 스스로 믿기로 결심한 의지의 차이 때문일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은 이 질문에 ‘효과 있는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라는 교리로 답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선포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택하신 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그 복음에 실제로 응답하게 하십니다.
앞선 제9장이 죄에 속박된 인간의 의지를 설명했다면, 제10장은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자발적으로 나아오게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1. 효과 있는 부르심은 무엇인가?|10장 1항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부르신다
제1항은 효과 있는 부르심의 주체와 대상, 방법과 목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효과 있게 부르신다.”
이 문장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부르심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때에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사람을 말씀과 성령으로 부르시며,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은혜와 구원의 상태로 옮기십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을 단순히 영적으로 약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엡 2:1)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교육만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가 필요합니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을 때 그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창 1:3; 요 11:43-44).
효과 있는 부르심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생명 사역을 보여 줍니다.
지성과 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성령
효과 있는 부르심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만한 증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장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한다고 설명합니다(롬 1:18-23).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죄로 인해 어두워진 마음입니다.
성령께서는 효과 있는 부르심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십니다. 이전에는 무의미하게 보였던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굳어 있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소원을 일으키십니다(엡 1:17-18).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기쁨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은 인간의 의지를 억지로 꺾는 것일까요?
신앙고백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그 사람이 “가장 자유롭게”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시면, 이전에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원하게 됩니다.
따라서 효과 있는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발적인 믿음이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여 그리스도께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속박된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기쁨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십니다.

2. 효과 있는 부르심의 원인은 무엇인가?|10장 2항
부르심의 원인은 사람 안에 있지 않다
제2항은 효과 있는 부르심의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서 앞으로 나타날 믿음이나 선한 가능성을 미리 보시고 그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 특별한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따라서 구원의 출발점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듭남과 믿음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먼저 사람을 살리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게 새롭게 된 사람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를 흔히 중생이 믿음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긴 간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의 근원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죄 가운데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하고, 이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엡 2:5, 8).
나사로가 먼저 살아난 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무덤에서 나왔던 것처럼, 구원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난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2장 12절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만 보면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은 그 근거를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권면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스스로 중생을 만들어 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실제 삶 속에서 살아내는 성화의 책임입니다.
성도는 적극적으로 순종하지만,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소원과 능력 역시 하나님께서 공급하십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의 범위|10장 3-4항
외적인 복음 선포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3항
제3항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유아기에 죽은 택함 받은 유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받는다.”
신앙고백이 강조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인간의 일반적인 수단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인은 일반적으로 말씀의 선포를 듣고 복음에 응답하지만, 어린 유아처럼 복음을 이해하고 언어적으로 믿음을 고백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구원 능력까지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으로 성령을 통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이 원리를 “말씀의 사역을 통하여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능력이 없는 다른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도 적용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도르트 신조 역시 신자의 자녀와 언약의 약속을 다루면서, 유아기에 죽은 자녀를 둔 경건한 부모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도록 목회적인 위로를 제공합니다.
외적 부르심과 효과 있는 부르심은 같지 않다|4항
제4항은 복음을 듣는 것 자체와 구원에 이르는 효과 있는 부르심을 구별합니다.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으며,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교회생활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 자체가 반드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오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마 13:20-21). 따라서 순간적인 감정이나 종교적인 열심만으로 효과 있는 부르심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의 핵심은 성령께서 사람의 내면을 새롭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제4항 후반부는 더욱 분명한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다른 종교나 인간의 도덕적인 노력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신앙고백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고백의 배경에는 성경이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로 선포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강압적으로 대하라는 근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구원이 인간의 종교적 성취에 달려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달려 있다면, 교회는 사람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고 사람의 마음을 여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지해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은혜를 알면 복음 전도의 태도가 달라진다
효과 있는 부르심의 교리는 먼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된 이유를 자신의 지혜나 판단력, 도덕성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복음을 들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 것은 우리의 영적인 통찰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 G. C. 베르까우어(G. C. Berkouwer)의 표현처럼, 신학의 중심에는 은혜가 있고 그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구원을 자랑하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은 복음 전도의 열심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반드시 부르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결과를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려고 조급해하지 않으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사람의 마음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마음을 바꿀 수 없으며, 전도자도 논리와 설득만으로 사람을 회심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으로 사용하여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은 또한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에 관한 정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더욱 귀하게 보이고 있는지,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새로운 소원이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제10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나아온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나의 지혜나 결단이 아니라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눈을 밝히시며 마음과 의지를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구원에 대한 우리의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자랑이 아니라 감사와 예배가 될 것입니다.
효과 있는 부르심은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죄인을 살리시고 그리스도께 기쁨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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