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5)-섭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 멀리 물러나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하신 세계를 지금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며, 역사와 자연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까지 자신의 지혜로운 뜻 가운데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흐름을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제2장은 하나님, 제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제4장은 창조, 그리고 제5장은 섭리를 다룹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창조에서 시작되어 섭리를 통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17세기 이후 이신론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이후에는 자연법칙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도록 두셨다는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현대의 자연주의적 세계관 역시 우주를 하나님 없이 작동하는 닫힌 체계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지금도 섭리자 하나님이십니다.

1.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일을 섭리하신다|5장 1-3항
자연법칙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가장 큰 것에서 가장 작은 것까지 모든 피조물과 행동과 사물을 보존하고 다스리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비가 내리고 계절이 바뀌며 행성이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자연법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자연법칙은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절대적인 힘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상적으로 다스리시는 질서와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근대 과학자 아이작 뉴턴에게도 자연을 연구하는 일은 창조세계에 나타난 질서를 탐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비가 내리는가?”라는 질문과 “누가 이 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리시는가?”라는 질문은 서로 다른 차원의 질문입니다.
섭리는 운명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운명론이나 결정론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실 때 다양한 제2원인과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창조에서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이시지만, 섭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제1원인으로서 피조세계 안의 수많은 제2원인을 사용하십니다. 자연법칙, 인간의 선택과 행동, 다양한 환경과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실제적인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섭리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환자는 치료를 받고, 학생은 공부하며,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말씀과 성례 역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양육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일반섭리와 특별섭리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세우신 질서와 제2원인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단에 제한받는 분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제2원인 없이, 그것을 초월하여, 때로는 그것을 거슬러서 역사하실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들이 대표적입니다. 물에 빠진 쇠도끼가 떠오르거나(왕하 6장), 자연의 통상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자연질서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특별섭리는 일반섭리를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존재한다고 해서 자연의 질서가 의미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에 갇혀 계시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이 세우신 질서와 수단을 통해 세상을 지혜롭게 다스리십니다.
2. 죄와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가?|5장 4-6항
섭리 교리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죄와 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면 인간의 죄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의 원인이 되시는 것은 아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붙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죄를 하나님의 섭리 밖으로 완전히 밀어내면 하나님의 주권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든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게 됩니다.
신앙고백은 어느 한쪽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의 죄악성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악한 의도로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분명 형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형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시면서도 그들의 악한 의도와는 다른 선한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제한하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죄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악을 제한하시고, 통제하시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다스리십니다.
욥기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욥 1:12; 2:6).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어떤 악을 허용하시고 어떤 악을 막으시는지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섭리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악은 하나님의 통제 밖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또 하나의 세력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고난은 버림받았다는 증거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신자의 삶에도 때때로 하나님께서 시험과 어려움을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때로 하나님의 임재가 멀어진 것처럼 느끼거나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깊이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때때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계는 정죄를 위한 심판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낮추시고, 감추어진 죄를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시고, 앞으로 죄를 경계하도록 훈련하실 수 있습니다.
반면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거두시거나 자신의 죄가 가져오는 결과에 내버려 두시는 방식으로 공의로운 심판을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동일한 어려움처럼 보이는 사건이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갖는 의미를 인간이 겉모습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섭리는 교회와 성도의 위로가 된다|5장 7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섭리에 대한 설명을 매우 인상적인 내용으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특별한 방식으로 돌보시며 모든 것을 교회의 선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렸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 고백은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당시 영국은 내전과 정치적·종교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미래가 인간의 눈에는 불확실해 보였지만 신앙고백을 작성한 신학자들은 교회의 운명이 정치적 권력이나 인간의 계획에 달려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보존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섭리는 고난받는 성도에게 위로가 된다
섭리 교리가 단순한 신학적 이론에 그친다면 우리의 삶에는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섭리는 특히 고난을 통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우리에게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이 많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실패, 질병, 관계의 어려움, 경제적인 문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처럼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건의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는 순간에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고난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는 질문에 항상 답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섭리 신앙은 답을 모르는 순간에도 이렇게 고백하게 합니다.
“나는 이 일의 이유를 모두 알지 못하지만, 이 일이 하나님의 손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은 믿습니다.”
섭리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준다
섭리 교리는 우리의 관심을 개인의 삶에만 머물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루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세계 전체를 다스리시는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혼란을 바라보면서도 역사가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을 뿐,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마지막을 아시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을 따라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교훈과 적용|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신뢰하는 것이다
‘섭리’라는 신학적 용어 자체가 성경에 그대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리신다는 진리는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섭리 교리는 우리에게 모든 사건의 이유를 알려 주는 공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에도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섭리는 고난받는 성도에게 특별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우연과 운명에 맡겨져 있지 않으며, 실패와 고난조차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동시에 섭리를 믿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을 충실히 사용하면서 오늘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합니다.
결국 섭리 신앙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가?”
섭리는 모든 일을 이해하게 해 주는 교리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위로의 교리입니다.